제주 해녀의 역사,
언제부터 있었을까

해녀는 오래된 직업이지만, 얼마나 오래됐는지는 정확히 말하기 어렵습니다. 기록은 조선시대부터 남아 있고, 그 이전은 추정입니다. 남아 있는 기록을 따라 해녀가 어떤 시대를 지나 지금에 이르렀는지 살펴봅니다.

한눈에 답

제주 해녀에 관한 기록은 17세기 조선 문헌에 잠녀라는 이름으로 분명하게 나타나며, 그 이전에도 잠수 채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선 후기에는 전복 진상의 부담을 짊어졌고, 19세기 말부터는 육지와 일본까지 나가는 출가 물질이 시작됐습니다. 20세기 후반 고무 잠수복이 들어오면서 작업 방식이 크게 바뀌었고, 지금은 세계가 인정한 문화유산이자 사라져 가는 직업이 됐습니다.

오래된 흑백 사진 느낌의 일러스트로, 흰 물소중이를 입은 해녀들이 바닷가 바위에 앉아 있는 장면
기록보다 오래된 일입니다.

해녀는 문헌에 언제 처음 나올까?

제주 여성이 바다에 들어가 해산물을 캤다는 기록은 조선시대 문헌에서 확인됩니다. 17세기 초 제주를 다녀간 관리들의 기록에 잠녀(潛女)라는 말이 나오고, 이들이 미역과 전복을 캐는 모습과 그 노동의 고됨이 적혀 있습니다. 제주에 유배 왔던 문인들의 글에도 잠녀가 등장합니다. 이 기록들은 해녀가 이미 그 시대에 하나의 직업 집단으로 존재했음을 보여 줍니다.

그 이전은 추정의 영역입니다. 삼국시대 문헌에 제주에서 진주와 전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어 잠수 채취가 오래전부터 있었다고 보지만, 그것이 여성의 일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해녀박물관과 여러 연구는 처음에는 남녀가 함께 잠수했다가 점차 여성의 일로 굳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시기기록과 변화
고대제주에서 전복 등을 공물로 바친 기록. 잠수 채취의 존재 추정
조선 전기~중기남성 잠수인 포작인과 잠녀가 함께 나타남. 전복 진상 부담 증가
17세기문헌에 잠녀가 뚜렷이 등장. 미역과 전복 채취 기록
19세기 말~20세기 초육지와 일본으로 나가는 출가 물질 시작
일제강점기해녀조합 착취에 맞선 해녀 항일운동
20세기 후반고무 잠수복 도입, 해녀 수 급감 시작
21세기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국가무형유산, 세계중요농업유산 등재

왜 여성의 일이 됐을까?

조선시대에는 전복을 캐는 남성 잠수인이 있었습니다. 포작인이라 불린 이들은 전복 진상과 군역을 함께 짊어졌고, 부담을 견디지 못해 도망치거나 줄어들었습니다. 그 몫이 여성에게 넘어가면서 잠녀의 부담도 커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입니다. 조선 후기 기록에는 진상할 전복을 채우지 못해 고통받는 잠녀의 모습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여기에 제주의 생활 조건이 겹쳤습니다. 농사가 어려운 섬에서 바다는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고, 여성이 물질과 밭일을 함께 맡는 구조가 굳어졌습니다. 해녀가 강인한 제주 여성의 상징이 된 배경입니다.

출가 물질이란 무엇일까?

19세기 말 제주 바다의 자원이 줄고 일본 잠수기 어선이 들어오면서, 제주 해녀들은 뭍으로 나가 물질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출가 물질이라고 합니다. 부산과 경남, 경북, 강원 해안은 물론 일본, 중국, 러시아 연해주까지 나갔습니다. 봄에 나가 가을에 돌아오는 계절 이주였고, 일부는 그곳에 정착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해녀 항일운동은 이 착취 구조에 맞선 운동으로, 구좌읍 하도리 일대에서 시작됐습니다. 해녀박물관 옆에 기념탑이 있습니다.

수백 년을 이어온 방식

해녀는 기록보다 오래된 방식으로 지금도 바다에 듭니다. Sumbi는 그 오래된 규칙, 자기 숨만큼만 머물고 함께 잠수한다는 원칙을 앱의 규칙으로 옮겼습니다. 이름부터 규칙까지, 이 문화에서 빌려왔습니다.

내 숨만큼 잠수해 보기 →

고무옷 이후, 해녀의 일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작업 시간의 변화

무명 물소중이를 입던 시절에는 찬 바다에서 오래 버틸 수 없어 물질 시간이 짧았고, 불턱에서 몸을 녹이는 시간이 길었습니다. 고무 잠수복이 들어온 뒤로는 겨울에도 몇 시간씩 물질할 수 있게 됐습니다. 수확은 늘었지만 몸에 무리가 가는 시간도 늘어, 잠수병과 만성 두통을 앓는 해녀가 함께 늘었습니다.

해녀 수의 변화

고무옷 도입 시기와 해녀 수 감소가 겹칩니다. 소득이 늘었는데도 해녀가 줄어든 이유는 다른 직업이 생겼고, 딸에게 물려주지 않으려는 어머니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해녀박물관의 구술 자료에는 "내 딸은 해녀 안 시킨다"는 말이 반복해 나옵니다.

유산이 된 직업

해녀 수가 줄어드는 사이 해녀 문화의 가치는 오히려 주목받았습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국가무형유산,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이어진 등재는 물질 기술만이 아니라 공동체 규범과 자연과의 공존 방식을 인정한 것입니다.

바다에서 배운 한 줄. 해녀의 역사는 더 많이 캐는 쪽이 아니라 오래 캘 수 있는 쪽으로 규칙을 다듬어 온 역사입니다. 폰을 내려놓는 습관도 한 번에 크게가 아니라 오래 갈 만큼만 정하는 것이 남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해녀라는 말은 언제부터 쓰였나요?
조선시대 문헌은 잠녀, 잠수 같은 말을 썼고, 해녀라는 말은 20세기 들어 널리 퍼졌습니다. 일본어 아마(海女)의 한자 표기와 같아 그 영향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지금은 우리말로 자리 잡았습니다.
해녀 항일운동은 어떤 사건인가요?
일제강점기에 해녀조합이 해산물 값을 후려치고 착취하자 구좌읍 하도리와 세화리 일대 해녀들이 집단으로 항의한 운동입니다. 여성이 주도한 대규모 항일 운동으로 평가되며, 해녀박물관 근처에 기념탑이 있습니다.
제주 해녀가 가장 많았던 때는 언제인가요?
해녀박물관 통계로는 20세기 중반이 가장 많았고, 그 뒤로 계속 줄었습니다. 구체적인 숫자는 이 구역의 해녀 인구 감소 글에서 다룹니다.
일본에 간 제주 해녀는 어떻게 됐나요?
일본 각지로 나간 출가 해녀 가운데 일부는 정착해 그곳에서 물질을 이어갔고, 후손이 남아 있는 곳도 있습니다. 대부분은 계절이 끝나면 제주로 돌아왔습니다.
해녀의 역사를 더 자세히 보려면 어디를 가야 하나요?
하도리 해녀박물관이 가장 체계적입니다. 시대별 전시와 구술 자료, 해녀 항일운동 자료가 있습니다. 국가기록원 누리집의 해녀 기록도 온라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글은 공개된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한 문화 소개이며, 수치는 참고 자료의 조사 시점 기준입니다.